비운의 왕자 소현세자 일대기 요약(영화 올빼미 등장 인물)

반응형

미스터리 사극 스릴러 올빼미가 개봉한 지 하루 만에 누적관객수 11만 명을 채우는 데 성공했다. 실제 역사적 배경에 허구를 가미한 영화로서 '인조'의 아들 소현세자의 의문스러운 죽음을 주맹증 침술사라는 허구의 인물을 등장시켜 재미와 스릴을 극대화했다. 영화를 보기 전 영화의 역사적 배경을 간략하게라도 알아둔다면 훨씬 더 재밌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 소현세자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이 오늘 글의 주제이다.

 

비운의 왕자 소현세자

 

소현세자는 1612년 인조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왕위에 오르면서 자연스럽게 세자로 책봉되었다. 한 나라의 왕자가 되었으니 행복했을까? 소현세자는 행복하지 못했다.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서 무려 8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고, 조국으로 귀국한 지 두달만에 사망했다. 

 

1. 소현세자의 죽음

 

소현세자는 8년만에 조국으로 돌아오자마자 두 달만에 사망했다. 소현세자의 사인은 공식적으로 말라리아라는 병이다. 당시 언어로는 '학질'이라는 단어로 오한과 발열이 반복되고 땀과 갈증이 심해지며 심할 경우 발작까지 일으키다 죽음에 이르게 하는 병이다.

 

 당시의 의술은 현대와 비교하면 처참한 수준이었기에 정확한 진단이나 치료가 이뤄졌을리 없다. 따라서 말라리아로도 충분히 사망할 가능성은 있다. 하지만 의문스러운 점이 매우 많다.

 

2. 조선왕조실록 - '4월 24일 세자가 침을 맞았다.'

 

조선왕조실록에 소현세자가 죽음에 이르던 날 전부터 침을 맞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이 '올빼미' 영화의 상상력을 더해주는 요소가 된 것이다. '올빼미' 영화에도 몸이 약한 소현세자의 치료를 담당하는 침술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3. 의문스러운 죽음

 

당시 세자의 모습을 목격한 '이세완'의 기록에 따르면 세자는 학질이 아닌 약물 중독으로 죽은 것 같다고 했다. 세자의 온몸이 전부 검은빛이었고 이목구비의 일곱 구멍에서는 피가 흘러나와 얼굴을 뒤덮었다고 한다. 피를 너무 많이 흘러 얼굴이 검은빛으로 변하였음에도 알아채는 이가 없었다고 했다.

 

위 기록이 사실이라면 소현세자의 죽음이 말라리아라고 하기에는 의문스러운 부분이 너무 많다.

 

당시 소현세자를 담당하는 의원은 '이형익'이라는 자였다. 영화에도 등장하는 '이형익'은 소현세자 사망 3개월전에 갑자기 특채로 입관한 의관이었으며 소현세자의 존재가 불편했던 인조의 애첩 '조소용'과 친분이 있는 자였다.

 

그런데 더 이상한건 자식의 죽음을 대하는 아버지 '인조'의 태도였다. 한 나라의 왕자가 의문스러운 죽음을 맞이하자 의원 '이형익'을 심문하여 진실을 파헤쳐야 한다는 대신들의 간청에도 '인조'는 "굳이 그럴 필요 없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또한, '인조'는 한 나라의 정식 세자에 걸맞지 않은 조촐한 장례식을 진행함으로써 죽은 아들에 대한 슬픔도 존중도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4. '인조'의 미움

 

소현세자는 인질로 청에 끌려갔지만 조선과의 친분을 위해 소현세자를 포섭하려 했던 청나라는 소현세자를 매우 각별하게 대했다고 한다. 소현세자는 조선에 청나라가 일으킨 중국 통일 전쟁을 위한 지원군 및 물자 요청을 담당했고, 청이 명나라를 정복해 중국통일을 이루자 인질로서의 가치가 없어져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이다.

 

인조는 자신에게 굴욕을 안긴 청나라를 미워했지만 중국을 통일한 청나라의 힘을 가까이에서 경험한 소현세자는 친화정책을 주장했다고 한다. 인조는 그런 소현세자의 태도에 불만이 굉장히 많았다고 한다.

 

인조는 청과 사이가 좋은 인조가 자신의 자리를 위협할까 매일 불안에 떨었다고 한다. 청황제의 명으로 조선의 왕위를 자신의 아들인 인조에게 양위하라고 한다면 본인은 거절할 수 있는 힘도 명분도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소현세자가 고국으로 돌아온 뒤 두 달 만에 사망한 것이다. 과연 우연일까?

 

5. 소현세자는 조선의 역사를 바꿀 수 있었다.

 

 소현세자는 탁월한 외교감각을 지녔으며 신 문물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 매우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인물이었다고 한다. 청나라에 있을 당시 독일 신부 아담 샬을 만났는데 서양인이 가진 지식에 대해 감탄했다고 한다. 

 

아담샬은 개방적이고 진취적인 소현세자를 만나고 조선에서도 선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하지만 청나라에서도 서양인 신부가 부족했기에 그의 바람대로 이루어지진 않았고, 소현세자는 아담 샬에게 조선에 돌아가서 서양과학과 문물을 전파하겠다고 약속했다고 한다.

 

국가의 미래를 끊임없이 고민했고 현실적이고 탁월한 외교감각, 신문물 및 서양과학의 위대함을 일찍이 알아채고 수용하길 원했던 소현세자가 정상적으로 조선의 왕이 되었다면 지금 조선의 역사는 다르게 쓰이지 않았을까?

 

위 내용을 모두 읽고 영화를 본다면 2배 이상은 더 재밌게 볼 수 있을 것이다.

 

아래 다른 흥미로운 주제의 글도 있으니 관심있는 사람들은 읽어보길 바란다.

 

 

반응형

댓글

Designed by JB FACTORY